1) 퓰리처는 누구인가?
① 퓰리처의 생애
1847년 헝가리의 곡물거래상 가정에서 태어난 퓰리처는 190㎝ 키의 야윈 몸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864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남북전쟁 때 제1뉴욕 런던기병대에서 근무했으며 세인트루이스로 이사와 선원, 부두인부로 일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지역신문에 실린 글이 눈에 띄어 기자로 발탁되었다. 신출내기 기자 시절부터 그는 연거푸 특종을 터트렸는데 당시 다른 신문사 기자였던 페이웰은 “그는 취재원이 분통을 터트릴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870년 미주리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가로도 대뷔했던 그는 겨우 5세에 지역신문인 ‘베스틀리해 포스트’를 인수했다. 이후 ‘세인트루이스 디스페치’, ‘뉴욕월드’를 사들여 기자들을 진두지휘했던 그는 사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사설문체를 다듬고 기사의 정확성을 따지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편집회의나 마감시간에는 서커스 같은 몸짓으로 기자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그의‘정확·간결·끈기’라는 기사작성의 3계명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퓰리처는 뉴욕월드에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고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의 부패에 비판을 가했다. 세제개혁캠페인, 노동자 권리 찾기 운동, 자유의 여신상 설치비용 모금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한편 그는 대중신문을 지향하며 정론과 이윤을 동시에 추구했다. 따라서 적극적인 만평·사진활용, 스포츠기사 본격게제, 일요판창간을 통해 현대 저널리즘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고, ‘뉴욕타임즈’가 10만부를 발행할 때 그는 이 신문의 독자를 100만 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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