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격변기에 산출된 강호미학의 정점
자(子)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 해옹(海翁)
해남 윤씨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남
국부(國富)로 불렸던 해남 윤씨 집안
8세 때 숙부인 윤유기(尹惟幾)의 양자로 입양
→ 해남 윤씨 가문의 장손이 됨
→ 해남의 대지주로서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누림
윤선도의 생애 -출생배경
윤선도 가문
윤선도의 생애 붕당 정치의 이해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대북파
소북파
소론
노론
광해군 집권 시기
인조반정 이후
윤선도의 생애
26세 (1612)
- 정계 진출
- 남인으로서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
- 왕권 강화, 북인과 서인의 타도 주장
30세 (1616)
- `병진소(丙辰疏)` ; 이이첨의 전횡(專橫) 비판
- 7년간의 유배생활의 원인이 된 사건
- 강직한 정치적 성품, 타협을 모르는 직선적 성격
37세 (1623)
-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의 붕괴 → 해배(解配)
- 서인 중심의 중앙 정계
- 남인인 고산은 여전히 정계 진출에 제약
42세 (1628)
- 정치적으로 가장 득의한 시기
;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師父)
; 공조좌랑, 한성부서윤, 시강원문학
윤선도의 생애
48세 (1634)
- 서인들의 견제에 못이겨 성주 현감에 좌천
→ 해남 은거
50세 (1636)
- 병자호란 발발
- 삼전도의 굴욕 소식 듣고 세상을 등지겠다는 생각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甫吉島) 발견
-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에 삶의 터전 마련하고 은거
윤선도의 생애
52세 (1638)
- 삼전도의 굴욕 당시에 인조를 알현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년 간 영덕으로 유배
53세 (1639)
- 유배에서 돌아와 해남에 은거하던 중, 금쇄동(金鎖洞) 발견
이후 약 17년간 보길도의 부용동, 해남의 금쇄동을 오가며 기나긴 은거생활
윤선도의 생애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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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현실을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의식 투영
- ‘전범(典範)적 자연관’의 거부
- ‘감흥의 절제’를 무시
16C 중반 영남 사림의 일반적인 강호 시조
강호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
윤선도의 문학관과 학문적 경향
작품분석 1.정치적 좌절의 미적 반영
「견회요(遣懷謠)」 4수, 「우후요(雨後謠)」 1수
: 정치 현실에의 관심과 연군지정의 형상화
이후 시조들이 보여주는 높은 문학적 성취의
질감에는 다소 미치지 못함
별다른 여과 장치 없이 직접적으로 드러냄
당대에도 이미 일반화된 관습적 시어들을 구사
작품분석 1.정치적 좌절의 미적 반영
슬프거나 즐거우나 옳다고 하거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견회요(遣懷謠)」 1수
추성(秋城) 딘호루(鎭胡樓) 울어 예는 저 시내야
무음 호리라 주야(晝夜)에 흐르는
님 향(向) 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견회요(遣懷謠)」 3수
굿은 비 개단 말가 흐리던 구름 걷난 말가
앞내의 깊은 소해 다 맑았다 하나산다
진실로 맑기 곳 맑아시면 갓끈 씻어 오리라 -「우후요(雨後謠)」
자신의 정치적 고집을 보여주고 있음
유배지에서 의 고독감과 연군의 정을 시냇물에 의탁하여 표현
정치 현실 참여, 복귀라는 강한 정치적 의지를 보여줌
작품분석 1.정치적 좌절의 미적 반영
내 일이 망령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견회요」 2수
강한 정치적 신념의 표출. 유배지에서 느끼는 고독감과 식지 않는 연군지정
초기 시조에 뚜렷이 나타나는
정치 현실에의 관심과 연군지정의 형상화는,
조선조 사대부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
작품분석 1.정치적 좌절의 미적 반영
풋잠의 꿈을 꾸어 십이루에 들어가니
옥황은 우스시되 군선(群仙)이 꾸짓나다
어즈버 백만억창생을 어느결의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