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쉬킨(1799~1837)
뿌쉬킨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600년전통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친가쪽의 선조들은 알랙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네프스끼 시대이래 대대로 러시아 왕실에서 벼슬을 했다. 부친은 퇴역장교로 문필활동을 했으며 모친은 아프리가 출신의 한니발 장군의 후손이었다. 뿌쉬킨의 외증조할아버지, 곧 뿌쉬킨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이디오피아 출신 흑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표뜨르대제의 총애를 받으며 한니발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고 러시아 여인과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아들 중의 한 명이 낳은 딸이 바로 뿌쉬킨의 어머니였다.
1811년 뿌쉬킨은 가정교육을 끝내고 귀족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짜르스코예 셀로라고 불리는 귀족학교는 러시아에 하나밖에 없는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 미래의 관료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 학교는 10세에서 14세 사이의 귀족 자제에게만 입학을 허용하였다. 귀족 학교의 교육 이념은 당시 진보 정치를 펼친 재상, 스뻬란스끼의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젊은 뿌쉬킨은 처음으로 영혼과 정신의 자유에 대해 배웠다. 귀족 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132편의 시를 썼다.
귀족 학교를 졸업한 뿌쉬킨은 규정에 따라 외무성에서 일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경기병 연대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10등관 관리로 외무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 대신 그는 문학활동에 몰두하여 ‘푸른램프’등의 문학써클에 활동하면서 정치적인 시를 발표하고 제까브리스트 당원들과 친밀한 유대를 갖는다. 특히 차다예프와는 우정을 통해 강하게 결속되었다. 그사이에도 `루슬란과 류드밀라`라는 6편으로 구성된 낭만적인 서사시를 써서 1820년 봄에 발표하였다. 이 시는 러시아는 당시 몇 십 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제카브리스트 봉기)이 일어나기 직전의 어수선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젊은 뿌쉬킨의 삶의 중심이 된 것은 `사랑`과 `자유`였다.
뻬…(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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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다.` 미하일롭스끼에서 쓰여진 작품의 대다수는 민족과 역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시인은 민중시가에 큰 매력을 느꼈고, 라진이나 뿌가쵸프 등 민중봉기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당시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건인 12월당 봉기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1826년 뿌쉬킨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뿌쉬킨은 비로소 심각하게 결혼할 생각을 했다. 그는 이전에 두 번 청혼한 적이 있었으나 번번이 신부감의 부모에게 퇴짜를 맞았었다. 그런 와중에 1829년 새해 무렵 뿌쉬킨은 무도회에서 16세의 나딸리아 곤차로바를 만나게 되었다. 4월말경 이미 뿌쉬킨은 곤차로바에게 청혼을 했으나 결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까프까즈의 아르즈룸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기세를 떨치는 페스트, 그리고 자신과 전 12월당원들과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지방관청 때문에 뿌쉬킨은 뻬쩨르부르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그는 재차 곤차로바에게 청혼을 하였고 이번에는 완전한 승낙을 얻었다.
1830년은 시작되자마자 시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1월 1일, 뿌쉬킨이 후원하고 델비그가 편집장을 맡았던 문학지 `문학잡지` 창간호가 빛을 본 것이다. 이 잡지의 창간은 시인이 오랫동안 고대한 것이었다. 또 그해 4월에는 뿌쉬킨과 나딸리아 니꼴라예브나 곤차로바의 약흔식이 있었다. 결흔식은 뿌쉬킨의 아저씨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조금 미뤄졌다. 뿌쉬킨의 행복은 1831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황제의 허락을 얻어 비극 「보리스 가두노프」가 출판된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말년은 꺼질 줄 모르는 문학적 열정과 가족에 대한 염려,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비록 사교계에서는 늘 경박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가정 생활에 있어서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사려깊은 가장이었다. 매우 힘든 시기였지만 여전히 뿌쉬킨은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