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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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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시대적 배경
개화기의 사회적 배경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정치·사회적 혼란상은 18세기 이후 실학자들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점점 더 가중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대내적 배경
대내적으로 조선은 60여년에 걸친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기강 해이와 삼정문란 등 정치적 부정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해있었다. 정치적 문란의 피해는 농민들에게 그대로 파급되어 가렴주구, 가뭄과 흉년 등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생활이 도탄에 빠져 유랑 농민들이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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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 배경
대외적으로도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의 문호를 개방(1854)하고 한반도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1854년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고 다시 한반도에 접근하고 있었다.
1876년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한 한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서구열강과 통상수호 조약을 연속해서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조선은 1910년 강제적 한일합병을 통해 국권을 상실하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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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양호사건 ◆
일본 군함 운양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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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주요 세력
19세기 중반으로부터 한일합병…(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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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음.
급진 대표인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개혁의 모델로 삼아 서양의 과학기술과 제도를 수용하여 조선의 모든 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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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론을 주장한
온건개화파 대표인물
좌: 김홍집 우: 어윤중
급진개화파 대표인물
왼쪽부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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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과 왕세자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급진파의 개혁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개화파는 긍정적측면에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한 점은 있으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친일적 경향이 지나치게 경도되어 오직 일본의 힘에 의존했을뿐만 아니라 소수 지식인 중심에서 벗어나 가장 핵심적 개혁주체인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개화운동을 범민족적 근대화 운동으로 전환하는데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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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입니다. 사진 가장 오른쪽의 양복차림의 사람이 고종으로 추정됩니다.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이 머무르던 방의 사진 →
←당시 일본은 러시간 공사관 내에서 고종을 나오게 하기 위해 일종의 무력 시위를 했습니다.
아관파천이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국ㄱ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옮겨 거처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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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근대학교의 성립
[1] 공교육제도 수립과 정부에 의한 근대학교의 설립
:정부는 다양한 각도로 교육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노력은 사절단과 유학생파견, 교육관련 법령의 제정, 근대적 관학의 설립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사절단·유학생 파견
정부는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한 후 김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