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재위 -
632년∼647년
본관 -
경주(慶州)
호 -
성조황고(聖祖皇姑)
본명 -
휘(諱) 덕만(德曼)
별칭 -
시호(諡號) 선덕(善德)
국적 -
신라
활동분야 -
정치
632년 - 여왕 즉위
634년 -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됨.
638년 -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
642년 -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김. 백제가 당항성(唐項城)을 빼앗겨 나당(羅唐)의 통로가 끊어졌고,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까지 함락당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 -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김 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여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함.
645년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 -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등이 이를 진압하였다. 반란의 와중에 여왕은 신병으로 사망하였고,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진덕여왕 [眞德女王, ?~654]
요약
신라 제28대 왕(재위 647∼654). 여왕을 반대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당나라와의 친교를 돈독히 하였으며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적 신라
활동분야 정치
↑ 진덕여왕릉 / 경북 경주시 현곡면. 사적 제24호.
본문
휘(諱)는 승만(勝曼)이고, 진…(생략)
|
만 명을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싸웠지만, 군사가 적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김유신의 부하인 비녕자와 아들인 거진이 적진으로 달려가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를 본 모든 장병들이 용기를 얻어 적을 무찔러 3천여 명을 죽였다.
2년(서기 648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쳤다. 3월에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군사를 거느리고 변방을 침범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빼앗았다. 왕은 크게 놀라서 압독주(경산) 도독인 김유신으로 하여금 이를 되찾게 하였다. 그는 훈련된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의직이 가로막으므로 김유신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몰아치게 하였다. 마침내 의직은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김유신은 맹렬히 적을 추격하여 대부분 죽였다. 그가 개선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모든 군사들에게 똑같이 상을 내렸다.
겨울에 사신 한질허를 당나라에 보내어 태종을 뵙게 하였다. 당태종이 묻기를,
"신라는 우리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정하고 있는가?"
하였다. 한질허는,
"일찍부터 당나라 조정에서 정하여 주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법흥왕 때부터 스스로 연호를 써 온 것이나, 이제 대국이 명령을 내린다면 어찌 따르지 않겠나이까?"
하고 대답하였다. 당 태종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신라 왕은 또 이찬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보냈다. 당 태종이 신하로 하여금 성 밖에 마중나가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게 하였다.
김춘추가 도착하자, 당 태종은 그의 몸가짐이 뛰어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춘추가 국학에 가서 공자를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자 청하니, 당 태종은 허락을 하고, `진서(진나라 때의 역사책)`를 주었다.
어느 날 당 태종은 또 그를 불러 황금과 비단을 주면서,
"그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듣고자 한다."
하였다. 김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