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학교교육
1. 시대적 특징
14세기 중엽 원(元)의 세력이 점차 약해져 가자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고 원이 차지했던 옛 영토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공민왕은 새로이 도입된 성리학[주자학]으로 무장된 신흥 사대부들과 힘을 합하여 원세력과 결탁해 있었던 대토지 소유의 구귀족과 대결하였다. 그 후 원 세력을 한반도에 몰아내는 데 성공한 공민왕은 관학과 과거제도를 통해 신진세력 을 양성·등용함으로써 구귀족들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려 하였다.
그 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권장악에 성공한 신흥 사대부 집단은 그들이 신봉하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하면서 국가의 모든 문물제도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정비하였는데 학교제도의 강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2. 성리학과 교육
종전의 유학이 실천적 ·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에 비해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올바른 행위의 원리와 근거까지를 깊이 탐구한다. 따라서 성리학은 다른 유학들에 비해서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이 강하며, 특히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를 핵심개념으로 하는 사상이다. 성리학의 교육 철학 역시 이기론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교육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에 이와 기란 요소가 존재한다고 본다. 먼저 기란 생명과 활동의 근원이며, 모든 사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질료 · 재료의 개념이다. 즉 기가 응축됨으로 해서 사물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란 바로 기가 응축되어 사물이 되는 이유요, 그 사물이 궁극적으로는 옳은 것을 지향하게 되는 근본 이치이다. 따라서 이는 우주 삼라만상의 기본 법칙으로 마땅히 모든 사물들이 따라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기는 항상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 일…(생략)
3. 조선시대의 학교교육
1) 성균관
2) 사학
3) 향교
4)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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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대롱 : 끊어 읽는 것이 분명하고, 해석에 막힘이 없으며, 한 가지 경서의 의미를 다른 경서와 관련해서 깊이 이해한 경우
통 : 한 가지 경서만 깊이 이해한 경우
약통 : 한 가지 경서에서 한 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한 경우
조통 : 한 장의 요지를 이해하나, 설명에 부족함이 있는 경우
조통이하 : 경서 중 한 장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조통 이하는 벌을 줌)
2) 사학
사부학당은 앞서 살핀 고려말의 5부학당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는데, 형편상 북학을 제외하고 동학·서학·남학·중학의 네 개 학당만을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성균관이 대학이었다면 사학은 소학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학교의 위계상 성균관의 하급 단계의 학교였다. 특히 사학은 첫째, 사학의 교관을 성균관 교관이 겸직하였으며 둘째, 성균관 정원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일종의 특차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균관의 부속학교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사학의 정원은 도합400명이었으나 조선시대 내내 한 번도 찬 적이 없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어 조선 후기에 20인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3) 향교
향교의 의미는 첫째, 지방학교에 대한 범칭으로서 향학과 같은 개념이었고 둘째, 지방의 특정한 학교를 지칭하는 일종의 고유 명칭이었다.
조선시대 향교의 규모는 일률적이 아니었으며, 행정 단위별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향교의 크기에 따라 학생 정원, 교관의 지위, 학전 등의 차이가 있었다
학생정원: 목 이상의 향교 90명, 도호부 향교 70명, 군 향교 50명, 현향교 30명
교관: 도호부 이상의 향교→ 교수 1명, 군 이하의 향교→ 훈도 1명
학전: 주·부 향교 7결, 군·향교 5결
향교의 교육내용은 유교경전의 강독과, 시나 문장을 짓는 능력을 학습시키는 것이었다.
4) 서원
16세기 이후에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을 의미한다.
최초의 사액 서원은 소수서원이다. 이는 명종 4년에 퇴계의 건의에 의해 국왕이 백운동서원을 사